두 가지 진리
그러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,진술,주장 관념,범주 등은 무조건 쓸데없는 것인가?
이 물음의 답으로 니가르주나의 "두 가지 진리"라는 가르침이 등장한다.한문으로는
진속이제(眞俗二啼) 라 하며,산스크리트어로는 Param?rtha-satya와sa?v?ti-satya 라
번역하고,요즘말로 고치면 "궁극적 진리"(ultimate truth)와 일상적 진리(conventional truth)라 할 수 있다.
나가르주나의 가르침을 보자.우리가 책상을 보고 "반질반질하다" 고 하는 진술은 궁극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 아니다."궁극적 진리" 아니라는 뜻이다.그럼 우리는 절대로 "반질반질하다" 는 말을 하면 안되는가?
울퉁불퉁한 책상과 비교해서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책상을 만지면서,"아.정말 반질반질하구나!"
하고 말하는 것은 무명에서 나온 어리석은 진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?
나가르주나는 이 경우에 한 "반질반질하다" 는 말은,일상적 진리에 해당하며 일상사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
구체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했다.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방편(方便)인 것이다.그러나 일상적 진리가 진리의 전부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.일상적 진리는 궁극적
진리로 인도하기 위한 전 단계여야 한다.나가르주나는 말했다. 일상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궁극 진리를 표현할 수가 없고,궁극 진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.
누가 석양을 보며 "아.이제 해가 떨어지는 구나!" 하는 소리를 했다고 우리는 그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며
"이 어리석은 사람아! 그런 말을 하면 안 돼. 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지구가 해의 반대
방향으로 돌고 있는 거야." 하면서 그를 나무라지는 않는다.비록 석양이 해가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이
오로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길 뿐이라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라 하더라도,일상사에서 "해 가 떨어진다" 는
말은 시간을 말하기 위한 수단으로,석양의 아름다음을 찬양하는 표현으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고,또 필요한 것이다.하지만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이 "해가 떨어진다" 는 말을 쓰는 것과,그것을 모르는 사람이
문자적 절대성을 고집하며 그 말을 쓰는 것은 천양지차다.지구의 자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"해가 떨어짐"
자체를 궁극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.
이처럼 사물에 대해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,그것이 "공" 의 입장으로 보면 절대적 타당성을
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.그래야만 일상적인 표현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기며.
거기에 집착하는 일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.나가르주나는 말했다."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가르침은
두 가지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.일상적인 진리와 궁극적 진리다. 이 두 가지 종류의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는
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.
-위 글의 저작권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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